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노 유타카 (문단 편집) == 프로선수 시절 == 데뷔시즌인 1977년엔 2군에서 담금질을 거듭하다 9월 4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경기에 등판하여 프로 데뷔를 이뤄냈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카케후 마사유키]]에게 아웃카운트 딱 1개를 빼앗는 동안 카타오카 신노스케[* 1971~1986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즈|라이온즈]], [[한신 타이거스|한신]], [[한큐 브레이브스|한큐]]에서 준주전-백업 [[포수]]로 활동했다. 은퇴 후 1987~2003년까지 [[히로시마 카프|히로시마]]에서 배터리 코치를 역임하면서 오노와 선수-코치 관계로 재회하기도 했다.]에게 [[만루홈런]]을 맞는 등 한신 타선에 무참히 공략당하면서 '''0.1이닝 5실점, 평균자책점 [[99.99|135.00]]'''이란 최악의 피칭을 기록했고, 결국 이 경기가 데뷔 첫 해의 유일한 등판이 되었다. 다만 오노 본인은 후에 아무리 성적이 나빴어도 이때(평균자책점 135.00)보다는 못할 수가 없어서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이 일을 떠올리면서 부진을 풀어나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이듬해인 1978년, 현금 트레이드로 난카이에서 히로시마로 오게 된 대투수 [[에나츠 유타카]]를 만나며 오노는 프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에나츠는 오노와 같은 이름에 [[좌완투수]], 편모가정이라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에나츠는 태어난지 얼마 안돼 아버지가 실종되어 어머니, 아버지가 다른 두 형들과 함께 살았다.] 오노에게 동질감을 느껴 [[동생]]처럼 친밀히 여겼고, 오노를 자신의 후계자로 불릴 만한 [[투수]]로 키워내기 위해 투구폼을 교정하고 변화구를 가르치며 철저하게 오노를 지도했다.[* 이때 오노가 연습 중에 한눈이라도 팔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억지로 등판했을 땐 철권까지 작렬하는 등 [[사랑의 매]]도 서슴지 않았다고.. 다만 에나츠는 오노를 때린 이후엔 [[고바 타케시]] 감독에게 곧바로 보고하고 오노의 모친에게 "귀한 아드님에게 손을 대어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했다고 한다.] 에나츠의 지도를 통해 실력 있는 투수로 성장한 오노는 1978년부터 6년간 카프의 든든한 [[중간계투]]로 활약하며 1979~1980시즌 카프의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이때 오노는 6시즌 동안 매년 '''평균 102.2이닝 ERA 3.15'''를 기록했고, 1981~82시즌엔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한 에나츠의 뒤를 이어 [[마무리 투수]]를 맡기도 했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1978시즌을 제외하면 '''평균 109.2이닝 평균자책점 3.07'''의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1980년부터 1982년까지 3년간은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평균자책점 2점대를 유지했다.] 이후 1984년부턴 선발로 전향하여 '''147이닝 10승 5패 평균자책점 2.94'''의 뛰어난 성적으로 카프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로테이션에 연착륙했고, [[1984년 일본시리즈]]에선 4차전 8회 말 1사 만루의 위기상황에 구원등판하여 [[부머 웰즈]]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마츠나가 히로미]]를 투수 땅볼로 직접 처리해 위기상황을 처리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며 카프의 3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카프는 이후 [[일본시리즈]]에 4번 진출했으나(1986, 1991, [[2016년 일본시리즈|2016]], [[2018년 일본시리즈|2018]]) 모두 다 '''졌고''', 결국 이 1984년의 우승이 현재까지 카프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남아있다.] 1985년엔 이전 시즌보다 월등히 늘어난 161.2이닝을 던졌으나 반면 평균자책점이 4.06으로 치솟았고 1986년엔 15시합 등판(6승 5패 92이닝 평균자책점 2.74)에 그치는 등 2년 간 다소 부진한 성적을 거뒀으나, 다음해인 1987년부터 완전히 각성하여 리그 정상급 투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해 25경기에 등판해 '''13승 5패 159.2이닝 ERA 2.93'''를 기록하더니 1988시즌엔 '''24경기 13승 7패 185이닝 ERA 1.70'''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수성하고 쇼와 시대의 마지막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다.[* 2020년 [[오노 유다이]]가 11승으로 수상하기 전까진 역대 [[사와무라상]] 수상자 중 가장 시즌 승리가 적었던 선수이기도 했다. 물론 2020년엔 [[코로나]]로 시합수가 격감한 것을 반영해야 되지만.] 다음 시즌인 1989년에도 '''19경기 8승 6패 145.2이닝 ERA 1.92'''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평균자책점 타이틀 수성+1점대 평균자책점 기록이라는 대활약을 펼쳤다. 이후 1991 시즌부터는 [[츠다 츠네미]]와 함께 더블 스토퍼를 구성하는 마무리 투수로 다시 활동하게 되었지만, 츠다가 뇌종양으로 인해 투병생활에 들어가자 홀로 마무리 자리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츠다를 위해 싸운다는 일념 아래 팀 모두가 우승을 향해 질주했고, 오노 또한 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 그 해 '''37경기 6승 2패 26세이브 ERA 1.17'''를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우승에 공헌했고[* 일본시리즈에선 아쉽게도 5년 전 [[역스윕]]을 허용했던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또다시 3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이후 카프는 암흑기까지 겹치면서 [[2016년 일본시리즈|다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무려 25년이 걸렸다.] 본인도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을 수상했다. 다음 해인 1992시즌에도 36세의 나이로 42경기 5승 3패 '''26세이브''' ERA 1.98로 리그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고 이는 당시 일본 프로야구 최고령 세이브 1위 기록이었다.[* 다만 이 당시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 수상 기준이 [[세이브 포인트]](SP)였기 때문에, 이 해엔 구원승이 7개 더 많았던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2SP 차이로 밀려 수상에 실패했다.][* 이후 2012년 [[이와세 히토키]]가 37세에 세이브왕을 기록하며 기록이 깨진다.] 이때의 활약으로 1993년 오프시즌 당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가 오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입단 제의까지 해봤지만, 오노 본인도 37세의 고령이어서 실제 계약까지 이뤄지진 못했다. 1995년엔 다시 선발로 전향했고, 1996시즌엔 개막전 투수까지 맡게 되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승운이 안따라주며 5월 10일에서야 개막후 첫 승을 기록했다. 그러다 왼팔에 동맥 혈전증이 생기며 부상으로 이탈하기까지 하면서 시즌 성적은 '''19경기 5승 4패 119이닝 ERA 3.93'''으로 부진했다. 부상을 겪은 데다 2년 연속 3점대 이상의 평균자책점, 거기에 나이마저 이미 40살을 넘겼기에 팬들은 슬슬 오노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1997 시즌 기적같이 부활에 성공하여 '''23경기 9승 6패 135.2이닝 ERA 2.85'''를 기록하며 9년 만에 41세에 나이로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수상했고 이는 아직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해 [[센트럴리그]]의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 레이스는 매우 치열했는데 1위부터 4위까지의 차이가 고작 0.14밖에 차이가 나질 않았다. 이때 타이틀을 두고 경쟁했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타바타 카즈야]](3위, 2.96), [[요시이 마사토]](4위, 2.99)에게 타이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시즌 막판 야쿠르트와의 최종전 때 양 투수가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히로시마 타자들이 선발 투수들에게 공격을 몰아붙여 조기 강판시키면서 경기 자체는 후반에 다른 투수진의 [[불질]]로 연패를 당했으나 오노의 타이틀을 지켜냈다. 추가로 2위였던 [[주니치 드래곤즈]]의 [[야마모토 마사]](2.92)는 시즌 막판까지 호투를 이어가면서 평자 1위를 수성하고 있었고 시즌 최종전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3.1이닝 2실점으로 부진하자 타이틀 방어를 위해 조기 강판하는 강수까지 두었으나, 하필 주니치의 시즌 종료 이틀 후에 오노가 같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요코하마]] 전에서 5이닝 무실점의 역투를 보여주는 바람에 1위 자리를 내주며 타이틀을 놓쳤다(...)] 1998년에도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개막전 투수를 맡았고[* 당시 팀 타선이 주니치 상대로 고전하면서 5이닝 3실점으로 패전을 기록할 뻔했으나 이후 팀이 후반에 3-8로 역전 승리를 거두면서 패전은 면했다.], 4월 12일에는 승리투수를 기록하여 당시 센트럴 리그 기록인 21년 연속 승리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2009년에 주니치의 [[야마모토 마사]]에 의해서 깨진다.] 그러나 많은 나이와 오랜 선수 생활로 인해 지병인 혈행장애가 악화되어 갔고, 8월 4일 원포인트로 등판한 요미우리 전에서 당시 신인이었던 [[타카하시 요시노부]]에게 역전 3점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면며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한달 뒤인 9월 27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치러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가 은퇴경기가 되었고, 이 경기에서 오노는 8회말 노아웃 상황에서 구원등판하여 나카네 히토시[* [[킨테츠 버팔로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1989~2003년까지 준레귤러 [[외야수]]로 뛰었으며, 요코하마의 [[1998년 일본시리즈|1998년 우승]] 당시에 좌투수 전문 [[플래툰]] 멤버로 활약한 바 있다. 은퇴 후엔 2006~2013년까지 요코하마에서 코치를 역임하였다.]를 상대로 삼진을 잡으면서 22년간의 긴 선수생활을 마무리지었다.[* 본디 나카네는 22년간 활약한 대선배 오노의 은퇴식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삼진으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초구부터 시속 143km의 몸쪽 꽉찬 직구가 들어오자 전력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오히려 대선배인 오노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전력으로 상대하기 시작했고 6구에 풀카운트까지 가는 승부 끝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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